아무 것도 보이지 않을 때 더 먼 곳을
서현석
1.
이웅철 작가는 학부과정 졸업작품으로 거대한 종이 비행기를 만들었다. 3층 높이의 허공에 매달린 6미터 길이의 비행체는 수렴된 꼭지점들로부터 안정적으로 펼쳐진 대칭의 날개 한 쌍을 가진 관념 속의 종이 비행기가 아니라 미공군기 F-117A를 닮은 모습이다. 최초의 스텔스기로 알려진, 일명 ‘나이트호크’.
‘스텔스’란 비행체를 감지하기 위해 발산된 전파가 발신지로 돌아가지 않도록 하는, 정확히는 반사파의 양을 획기적으로 최소화하는 기술이다. 즉, 적의 방공망에 감지되지 않으려는 ‘클로킹(cloaking)’ 기술이다. 이를 위해서 열감지에 취약한 배가가스를 신속히 냉각시키고, 비행체 표면의 재질의 전파 흡수율을 높이며, 전파를 여러 방향으로 분산시키는 등 다양한 최첨단 기술들이 집약된다. ‘나이트호크’의 기체 표면이 각진 기하학적 패턴으로 만들어진 것은 도달하는 적으로부터의 전파를 그대로 돌려보내는 대신 여러 방향으로 분산시키기 위함이다. 마치 종이로 접은 것같은 표면 구조는 적어도 보잉 민간 항공기보다는 비행기 모델로 만들기에 적합하다.
이웅철 작가의 ‘나이트호크’는 물론 보는 이의 감각에 빤히 노출되어 있다. 종이라는 재료가 인식의 망을 회피할 수 없음은 명백하다. 비행체는 실제 활강을 할 듯 허공을 거대하게 점유하고 있지만 어린 시절 추억 속 종이 비행기의 훌륭한 공기역학적 구조와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이 커다란 물건이 중력을 거스르며 허공을 멋지게 수평으로 가를 수 있을지는 매우 의문스럽다. 실제로 1세대 첨단 스텔스기의 각진 표면은 공기역학적으로 매우 불합리한 구조다. 은폐 효과를 최적화하기 위해 비행을 위한 효율성을 희생한 게다. 구조에 근거를 두고 사고실험을 해보는 관람객에게는 이 매끈한 첨단 비행체에 불길한 미래처럼 불가능의 그림자가 중복된다. 아니나 다를까, 허공에 뜬 의뭉스런 스텔스기는 이미 앞쪽이 심하게 기울어져 있다. 활강이 아니라 바닥에 곤두박질치는 형상이다. 작가는 이에 <소멸의 방향>이라는 제목을 붙였다. 팽창주의 살상무기의 종언을 기원하는 걸까? 2010년에 만들어진 이 종이 비행기는 질료의 단순함을 넘어 어쩌면 이웅철 작가가 이후에 펼치게될 작품세계, 그러니까 ‘미디어아트’라 칭해지는 그의 횡단을 암시하는 몇 가지 미학적 전조들을 함유한다.
5.
이웅철 작가의 여섯 번째 개인전 《비-세계》전에 포함된 <Tower> 연작은 누가 보더라도 콘스탄틴 브랑쿠시(Constantin Brâncuși)의 <끝없는 기둥(Endless Column)>을 떠올리게 한다. <끝없는 기둥>은 그를 이끌고자 했던 로댕으로부터 벗어나 독자적인 행보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하나의 중요한 기점이 되었던 작품이다. 브랑쿠시는 형식/형태(form)가 곧 의미임을 피력했다. 그가 말하는 ‘형식/형태’란 사물의 순수하고 완전한 본질이다. 의미는 형식/형태와 분리될 수 없다. 이러한 완고한 플라톤주의는 미니멀리즘의 사상적 유전자로 20세기를 관통했다. 1918년에 동네에 쓰러져 있던 참나무를 깎는 것으로 처음 시작된 <끝없는 기둥>은 서로 뒤집힌 피라미드가 모듈처럼 반복적으로 연결되는 수직 구조를 갖는다. 4쌍의 피라미드로 이뤄졌음에도 제목이 말하는 무한성을 지시하는 프로토타입은 양적으로 확장되며 1938년에는 30미터에 달하는 대형 야외 조각으로 이르렀다. 연작의 마지막이 된 이 공공미술 작품은 한 때 방치되어 철거될 운명에 처했지만 20세기가 끝날 무렵 복원되었다. 철 주물에 아연과 황동으로 복원 처리된 표면은 자연광 아래에서 수려한 자태로 빛난다. 사물의 물성을 극단적으로 드러내면서도 주변 환경과의 일체감을 이루는 힘은 비등방성에서 오는 것이다.
원작 <끝없는 기둥> 표면의 비등방성은 이웅철 작가의 <Tower No.1>(2025)에서 철저히 감춰진다. 말 그대로 꽁꽁 ‘은폐’되었다. 은폐의 도구는 밧줄이다. 작가는 플라스틱의 일종인 ABS로 브랑쿠시의 시그니처 곡선을 단순한 직선으로 무마했다. 목공예의 달인이었던 브랑쿠시의 세밀하고 성실한 노동은 대량생산 시대의 일률적인 기계적 단순함으로 축소되었다. 마치 이를 가리기라도 하듯 밧줄은 형태 전체를 꽁꽁 애둘러 싸고 있다. 각진 윤곽선은 여전히 드러나 있으나 표면의 ‘은폐’는 완벽하다. 밧줄의 거친 질감은 비등방적이지 않다. 온통 밧줄로 감싸진 타워. 모더니즘 마스터의 이름과 더불어 21세기의 모든 동시대인에게는 어쩔 수 없이 치솟는 하나의 관념을 막을 길 없다. 고양이.
설마? 순수 형식/형태의 완고함에 불순한 농담을 씌우는 게 작가의 의도인 걸까? 의심이 합리성을 획득하기 위해서 감각의 복기를 요구한다.
브랑쿠시. 고양이.
불온한 몽타주는 뒷문으로 슬그머니 소리 없이 들어오며 일상을 오염시키는 길고양이처럼 어느덧 완고한 플라톤주의의 미학적 자체완결성을 속으로부터 순식간에 녹여 버린다. 밧줄은 전유로 탈바꿈하여 팝아트라는 모더니즘의 최후의 방어막마저도 무화하며 원초적이면서도 기하학적인 질서를 표방하는 브랑쿠시의 순수 ‘형식/형태’에 터무니 없는 ‘기능’을 투여한다. 고양이가 발톱을 갈무리하기도 하고 인간의 일상을 내려다보게 해주기도 하는 놀이터이자 안식처로서의 기능. 순수 이상으로서의 형식을 추구했던 모더니즘 정신은 고양이 집사의 다소곳한 봉사로 대체된다.
2.
종이 나이트호크의 각진 기하학적 표면은 7년 후 <무감각의 병리 - 파리 & 브뤼셀>(2017)에서 불규칙한 패턴으로 변주된다. 벽에 걸린 입체 회화, 혹은 평면에 가까운 조각이랄까. 작품은 학부와 대학원 과정에서 각기 그가 전공했던 회화와 입체미술의 사이에서 각 영역에 대한 이중의 매체 환원성을 머금는다. 포멕스와 아크릴로 만들어진 각진 50여개의 삼각형과 사각형들은 서로 접선을 마주하며 회화적 평면으로부터 이탈, 울퉁불퉁 불규칙한 입체적 구조를 이룬다. 이에 따라 작품은 보는 이의 위치에 따라 조금씩 다른 패턴을 보여줄 뿐 아니라 각 면의 색상과 채도 역시 다르게 나타난다. 즉, 전시장의 조명이 다른 각도로 반사되어 관람객에 감각됨에 따라 작품은 광학적으로 가변성을 갖는다. 균일적이지 않은 배치 때문에 물리적 성질이 다르게 감지되는 비등방성(非等方性, anisotropy)이 곧 작품의 정체성으로 발현된 것이다.
스텔스의 표면에도 나타나는 비등방성의 구조가 이번에는 살상무기라는 구체적 맥락을 배제한 채 관람객의 감각을 미묘하게 교란시킨다. 작품은 분명 보는 행위의 물리적 조건에 대한 탐색을 요청한다. 예술적 체험의 근원에 대한 질문을 빛의 반사라는 미시적 물리적 현상에 미세하게 투입하는 것이다. 이는 눈에 보이지 않는 극단의 미시성까지 가닿는 근원적 질문이다. “사물의 요철에 빛이 맺히는 현상으로 우리는 실물을 시각적으로 해석”한다는 작가의 취지는 ‘작품’과 정신의 물리적 상호작용의 비밀을 풀기 위한 실마리로 작용한다. 예술과 인간의 관계성을 탐구하기 위한 행보가 물리학과 미학의 접점으로 작가를 이끈 것이다.
지각 현상에 대한 근원적 여정에 초기작의 정치적 맥락이 완전히 제거된 것은 아니다. 이 형상은 특정한 어느 하루 동안 세계 곳곳으로부터 전해지는 전쟁, 테러, 재난 등의 뉴스 이미지들을 컴퓨터로 합성하고 필터링한 결과이다. 참사를 겪는 당사자들의 경험이 삭제된 채 일상의 평범함 속으로 녹아드는 국제적 권력체들의 폭력성을 전용하듯, 보는 각도에 따라 다른 형상과 색채를 전람하는 각진 입체 구조는 말그대로의 ‘무감각’만을 전가한다. 권력이나 폭력, 이에 대한 대중의 무감각을 비판적으로 바라보거나 고발하지 않고 카멜레온처럼 무감각의 환경에 스스로를 편입시킨다. 무감각을 무색하게 반추한다. 정치적 동기는 은폐되었다. 스텔스기가 그러하듯 말이다.
어쩌면 이웅철 작가는 졸업 작품부터 탐구한 감각 정보를 반사하지 않는 크로킹 기술을 광학적인 차원을 넘어 사유의 방법론으로 변환하는 방법을 익혔던 건지 모른다. 마술적 개념미술이랄까. 말하자면 그가 지향했던 “소멸의 방향”이란 정치적 폭력의 ‘소멸’을 기원하기에 앞서 그러한 정치적 태도 자체를 은폐하는 위장술을 말했던 것일지 모른다. 종이 스텔스기의 추락하는 자태를 미국의 제국주의적 팽창, 혹은 군사적 목적에 봉사하는 첨단 과학기술에 대한 비판으로 읽도록 권유하는 작품 제목의 방향에 작품의 모든 결들이 동참하고 있지는 않은 것이다. 보는 이의 ‘관점’에 따라 ‘해독’이라는 인식과 사유의 레이더가 엉뚱한 방향으로 난반사될 여지를 작품은 머금는다. ‘개념적 비등방성’로서의 작품, 즉 포커페이스로 위장한 문제의식은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것이 숨기려는 폭력성을 특정한 국지전보다 더욱 큰 인간적, 지구적 스케일로 확대할 수 있다.
6.
브랑쿠시의 <끝없는 기둥>을 본딴 타워의 클로킹은 사실 지난 전시에서 온전하게 구현된 바가 있다. 2020년에 전시된 <유령조각>을 이루는 다섯 점의 새파란 기하학적 조형물들엔 <끝없는 기둥>을 본딴 타워가 포함되었다. 견고한 균형미를 지닌 이 PLA 조형물들은 벽에 영상 이미지로 투사되는 실시간 전시 광경에서 감쪽같이 삭제되었다. 간단한 크로마키 효과를 통해서이다. 푸르뎅뎅 반반한 표면의 비등방성으로 강화되는 실물 조각의 존재감은 이를 부정하는 영상 이미지의 대비효과로 인해 더욱 명백해지지만, 이미지의 이의제기에 의해 그 아우라를 삭감 당한다. 현현과 부재의 벡터 사이에서 우리의 지각과 인식은 양가적으로 진동할 수밖에 없다.
<유령조각>이 던졌던 물성에 대한 질문은 《비-세계》전에서 순수 형식/형태에 대한 의문으로 전이된다. 크로킹의 기술은 이상을 품는 인간의 권위를 소거하는 도구적 논리로서 재편성된다. 그러한 비인간의 터에서 크로킹을 구사하는 유령 주체는 기둥도, 순수 이상으로서의 ‘형식/형태‘도, 작가도 아니다. 그것은 크로킹 기술을 완성했기 때문에 아예 보이지 않는다. 나이트호크보다도 감쪽같은 은폐술. 그 주인공은 바로 고양이다. 이상미 큐레이터의 표현을 빌리자면, “부재하는 감각 주체”이다. 고양이가 점령함직한 타워가 있을 뿐. 고양이의 사냥 근성을 자극할 만한 세라믹 비둘기가 타워 바로 옆 창가에 놓여 있으나 그 평온한 자태에 포식자의 낌새는 투영되어 있지 않다. 체셔 고양이가 허공에 흩어지면서 흘렸던 조소마저 완벽한 클로킹 주체의 자리에서는 사라져 있다.
3.
사실 종이 나이트호크에는 그 어떤 예리한 관람객의 레이더조차 감지하기 어려웠을 하나의 구체적인 역사적 맥락이 암호처럼 숨겨져 있었다. 실제 나이트호크가 수행한 대표적인 군사작전들에는 2003년 이라크 전쟁이 포함된다. 그리고 이는 작가의 2023년 개인전 《검은 돌과 다리미》에서 불거져 나오는 작품의 역사적 배경과 무관하지 않다. 중동이라는 시공이다.
‘돌’. ‘다리미’.
제목이 호명하는 두 사물은 1978년부터 이란과 사우디아라비아의 건설현장에서 근무했던 작가의 아버지가 남긴 일기로부터 기져온 모티프들이다. 전시는 아버지의 일기에서 발췌된 일부를 앞세워 중동의 건설현장을 재구성한 목탄화, 아버지가 유성 조각이라 여기며 사막에서 주어온 돌의 변형을 상상하는 단채널 영상 <전망>, 그리고 글자가 뒤집힌 채로 벽에 적혀 반대편 벽의 거울을 통해서만 제대로 읽을 수 있는 김리윤의 시 「검은 돌 안에서」, 그리고 스크린을 지지하는 아시바 구조에서 위태로운 움직임을 보이는 한 퍼포머의 제스처 등을 통해 아버지가 남긴 중동의 기억들에 다각적으로 다가간다. 작가의 탐색을 ‘비등방적’인 위장술로 방어하는 듯 ‘아버지의 중동’은 흩어진 파편들을 난반사하듯 우리에게 흩뿌린다.
“아버지의 경험은 사적이지만 시대상과 관련하여 자원과 환경, 경제, 기술, 노동 등 여러문제를 함의한다”고 작가 자신이 밝히듯, 아버지의 중동은 단순함으로 가장한 다층적인 시공간의 결들을 끌어들인다. 냉전과 오일쇼크로부터 신자유주의에 이르는 역사적 다난함을 중동이라는 장소는 온통 품고 있는 것이다. 움직이는 물체가 세 개만 되어도 그 역학은 예측을 불허하는 ‘무질서’에 가까워질만큼 매우 복잡해진다는 ‘삼체이론’이 시사하듯, 다리미와 돌 이외에 다원적인 시공으로부터 불러들여지는 여러 모티프들은 거시적 역사와 개인적 감정을 위태롭게 아우르는 별자리를 느슨하게 형성한다. 그 복잡한 별자리의 중심에는 미국이 있다. 1970-80년대 당시 중동 국가들과 대한민국이 지녔던 경제발전이라는 공통의 꿈은 미국의 ‘우방’들로서 가질 수 있었던 미래의 청사진이었다. 미국지상주의에 복종하는 국가에는 달러가, 반발하는 국가들에는 스텔스기가 날아갔다. 작가의 아버지가 천공 증상으로 요양을 하던 바로 그때 친미국 정책을 일관한 사우디아라비아의 빈 살만 황태자가 한국을 방문한다는 소식이 흘러나왔다는, 전시의 계기가 된 기이한 동시성의 배경에 비대하게 자리잡은 미국이라는 존재는 《검은 돌과 다리미》를 이루는 파편들 사이에 편재한다. 나이트호크처럼 원숙한 클로킹을 구사하며.
작가 아버지의 일기는 중동의 특정한 시공으로 관람객을 인도한다. 타인의 기억과 관람객의 상상 사이에서 펼쳐지는 사우디아라비아의 사막은 “마치 하얀 밀가루”같다. 오일, 전쟁, 패권의 격전지로서 어울리지 않는 곱디고운 하얀 가루. 그러나 그를 잠식하는 열기는 숨쉬는 것조차 고난스럽게 한다. 모래폭풍이 닥치면 그 고운 입자들은 인간의 보는 능력과 움직이는 능력 모두를 박탈한다. “무덤 같은” 어둠이 온다. 모든 걸을 멈추고 대책 없이 두려움 속에 갇힌다. 그러나 일기에는 극도의 아름다움이 몽타주처럼 병치된다. 노을의 시간이 그렇게 사막의 고난을 카타르시스로 전환한다. “사막인지 하늘인지 모르게 모든 게 합쳐진 불구덩이”는 일기를 읽는 이의 상상 속에서 숭고미를 발산한다. (이 “불구덩이”는 어쩌면 전시장 벽을 둘러싼 <불의 표면>의 불 영상에서 변주된다.)
아버지가 검은 돌 하나를 발견한 건 이런 “불구덩이” 속이었다. 밀가루 같은 모래 속에 남아 있을 리가 없는 돌을 유성 조각이라 여긴 아버지의 추측은 충분히 합당하다. “줄로 다듬으려 해봐도 흠집조차 나지 않았”다는 점은 이 합리적 의심을 뒷받침한다. 전시의 또 하나의 주제어인 ‘다리미’가 가사노동의 무게를 덜어주는 근대화의 표상으로서 인간의 인공적 개입을 대표한다면 돌은 유성으로서의 진위와 무관하게 인간이 점유하는 시공간의 스케일, 나아가 지구중심의 지질학적 지반을 훌쩍 초과하는 우주적 맥락을 불러들인다. 다리미의 정형화된 형태, 돌을 능가하는 무게 및 크기는 작은 돌에 불과한 물체의 잠재적 무한성 앞에서 오히려 초라해진다.
“아주 작은 / 세계를 녹여 만든 것처럼 / 다른 세계의 파편처럼 / 무거운 / 중심을 벗어날 수 없는 무게로 / 경계를 헝클어뜨리는 모래 속에 // 흠집 없는 / 흐트러짐 없는 아주 / 조그만 경계를 이루며 / 견고한 윤곽으로 놓인 / 검은 돌”
아버지가 돌을 습득하고 40여년이 지나, 작가가 된 아들은 이 의문의 돌 표면을 다듬고 벗겨내고 변형시킨다. 아버지가 할 수 없었던 인위적 가공을 가한다. 물론 컴퓨터 이미징을 통해서이다. 《검은 돌과 다리미》전에 포함된 단채널 영상 <전망>은 거듭 허물을 벗는 돌의 변신을 구체적으로 묘사한다. 돌의 표면을 깎아내자 흩어지는 돌가루 사이로 황금빛의 층이 드러난다. 황금빛의 표면을 깎아내니 은빛으로 빛나는 층이 나타난다. 점점 더 비등방적이 되어가는 표면은 주변의 환경을 반사하는 정도가 극대화되며 투명해보일 정도의 클로킹 수준에 이른다. 영상의 마지막은 변화하는 돌을 따라 배경이 변함으로써 사물과 환경의 일체감을 보여준다. 클로킹은 맥락에 변화를 가하는 차원으로 확장된다. 마치 미니멀리즘 작품처럼.
7.
브랑쿠시의 30미터 높이의 <끝없는 기둥>은 1차 대전 때 작가 본인의 고향인 루마니아 트루그지우(Tärgu-Jiu)를 침공한 나치에 맞서 목숨을 바친 참전군인들을 기리기 위해 고뤼(Gorj)시 여성연합의 의뢰에 따라 1938년에 만들어졌다. 사회주의 체제 내에서 이 공공미술 작품은 “국제적 부르주아 형식주의”라 비판 받았고 철거 계획까지 뒤따랐지만 20세기가 끝나갈 무렵 복원되는 우여곡절을 겪었다. 브랑쿠시는 본인의 작품이 원초적 제식의 연장선 상에서 인간 정신과의 교감을 확장해가길 바랐다. 인간의 유한성을 극복하려는 “형식주의”의 염원은 전쟁의 폭력성을 반추하는 맥락에 놓였다가 이제는 시대를 관통하는 인류의 난제에 대한 초월의 의지를 발산한다. 그에 있어서 ‘형상화’란 사물의 물성을 넘는 정신적 승화로의 활강이다.
인간의 폭력성에 대한 20세기 아방가르디스트의 묵상은 이웅철 작가의 《비-세계》전에서 21세기 인류가 공유하는 인간중심주의에 대한 자성으로 확장된다. 《비-세계》전은 “인류가 지구에서 완전히 사라진 이후를 상상”할 것을 제안한다. 사우디아라비아의 사막으로부터 아버지의 손을 거쳐 전시장에 스며든 하나의 관념으로서의 검은 돌이 지정학적 맥락을 지질학의 심연으로 작가의 인식을 인도했듯, 브랑쿠시의 형식/형태는 전쟁과 팽창주의의 연장선 상에서 인류세의 불확실성에 대한 자성을 일으킨다. “인지적 구심점이 해체된 이후의 세계”는 인간 중심적 미술 행위의 근본으로부터의 붕괴를 전제한다.
<전망>에서 보이지 않는 힘이 돌의 표면을 깎는 것처럼 <Tower No.1>의 밧줄을 벗긴다면 브랑쿠시의 순수 형식에 상응하는 골격이 드러날 것이다. 벌거벗은 형태는 일상적 사물과의 인위적인 결탁을 끊어내고 순수한 물성의 아우라를 지닐 것이다. 그러나 이웅철 작가는 그러한 순수 이상의 현현을 모색하는 대신 늘 불가능의 현실을 탐색해왔다. <유령조각>이 기술적으로 추구한 “소멸의 방향”은 물성에 대한 질문임과 동시에 모더니즘의 형식/형태에 대한 질문을 짊어지는 개념적인 과정이기도 하다. 반-플라톤적 세속주의랄까. 인간 문명 너머의 무한성(infinity)을 향한 브랑쿠시의 ‘믿음의 도약’은 이웅철 작가의 “비-세계”에서 불확실성으로의 던져짐으로 각색된다. 아버지의 돌이 시공간의 특정한 지정학적 맥락에 던져지며 보다 장대한 스케일의 시공 속 인간 스케일의 왜소함을 들추어냈듯, ‘타워’를 정령하는 “부재하는 감각 주체”는 인간을 중심으로 삼는 세계관에서 벗어나는 작은 첫 발자국을 종용한다. 그것이 향하는 세계는 불투명하다. 그에 있어서 ‘형상화’란 불투명한 것을 직면하는 과정이다.
허물을 벗고 나타나는 순수 이상으로서의 ‘형식/형태’의 자리를 대신하는 것은 세속화된 물성이다. 모더니즘이 등극시켰던 창조 주체로서의 인간을 중심으로부터 몰아내기 위한 위장술이랄까. 이는 이웅철 작가가 인류세의 극복을 위해 지명하는 비-인간이 신화 속의 ‘가이아’나 사이보그가 아니라 고양이라는 사실을 뒷받침한다. “소멸의 방향”을 실천하는 주체는 주체성을 생산하지 않는다. 더 이상 주체성을 생산하지 않기 위해서는 거대한 이념을 앞세우는 것보다 사소한 상념과 노니는 것이 적절한 방식일지 모른다. 자신의 이상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마치 고양이처럼.
만약 이웅철 작가가 인류세를 극복하기 위한 방법으로서 미술의 유효함을 믿는다면 인간 이상의 아우라를 소거해내는 기능에서 그 방법론을 찾고 있을지 모른다. 인간 감각과 지식의 개입이 배제되는 미술을 상상해내기. 그것은 어쩌면 세밀한 크로킹으로 위장한 채 우리 앞에 이미 와있을 것이다. 감각의 레이더를 회피하는 어떤 것은 부정의 논리로서 유추된다. “비-세계”랄까. 자본과 권력에 잠식된 세계에서 “비-세계”는 세계에 대한 변증법적 뒤틀기로서 실행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즉, 밧줄의 허물 속에 감춰진 순수 형태는 이상 그 자체가 아니라 이상에 대한 인용구 이상도 이하도 아니어야 하는 것이다. 마치 일상적 현실의 평행현실이 그러하듯, 간단한 기술로 미술의 정념을 소거한 <유령조각>의 영상 이미지가 그러하듯, 소멸의 방향을 갖는 세계는 파생적으로 현현한다. “비-세계”는 “세계”를 매개로 펼쳐지는 잉여적 영역이다.
“단순함이 미술의 목표가 되어서는 안된다. 사물의 실체에 다가갈 때 도리어 단순함에 도달하게 된다.”
브랑쿠시에 있어서 형식/형태의 단순함은 역설 같은 것이었다. 이웅철 작가에게는 클로킹이 그런 역설일지 모른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을 때 더 먼 곳을” 감각하기 위한 역설.
4.
<무감각의 병리 - 파리 & 브뤼셀>을 이루는 다면체들의 맞물림을 인간의 시선이 닿지 않는 미시적 스케일로 세밀화하면 어떻게 될까? 그리고 다면체들의 형태와 크기가 수시로 변화하면? 이에 따라 면들의 비등방성이 감지하기 어려운 미세한 수준의 시간적 공간적 간극을 촘촘히 변화시키면?
이러한 사고실험을 컴퓨터 그래픽으로 구현한다면 물표면처럼 보일 것이다. 말하자면 단채널 비디오 <물의 겉면>(2020)이 그러한 모습이다. 단순한 직설적 제목은 컴퓨터 그래픽을 가동하는 복잡한 연산 과정을 은폐한다. 끊임없는 광학적 난반사는 물결이 자연광 아래 반짝반짝 빛나게 보이는 효과로 우리 눈에 감지된다. 작가의 말대로 비등방성은 “사물에 사실감을 주는 중요한 요소”이며 컴퓨터그래픽의 극사실주의를 지지하기 위해 도입된다.
그러나 컴퓨터는 물질의 미시적인 차원으로 세밀하게 진입, ‘파티클 노이즈’를 이루는 파동의 수준에서 작업을 할 수 있게 해준다. 즉, 거대 종이 비행기를 만들 때의 거대 제스처로서의 신체 노동이 “마치 액션페인팅처럼 마우스로 클릭하여 뿌려주는 역할만 하면 형상은 자동으로 완성”이 되는 차원으로 간소화되는 것이다. 작가는 이 작품이 현실과 가상을 가르는 경계의 묘연함을 지시한다고 말한다. 이러한 경계의 유연한 무화가 빙의시키는 “비-세계”는 물론 연산된 데이터 값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