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보는 바로 그것>
신승오(페리지갤러리 디렉터)
이웅철은 우리가 바라보는 다양한 이미지의 형태에 대해 관심이 있다. 이는 조형의 가장 기본이 되는 점, 선, 면으로 시작하는 평면에서부터 입체 그리고 물성을 가진 대상에서 비물질적인 디지털 이미지와 동영상에 이른다. 그는 컴퓨터 그래픽과 같이 가상의 공간에 표면으로만 이루어진 텅 빈 이미지와 실제의 공간에 실재하는 대상과의 관계성을 동시에 연구하고 있다. 이는 가상의 것은 어떻게 우리에게 인식되고 우리 눈앞에 실재하는 것을 보는 것은 어떤 의미인지 살펴보는 과정이다. 이러한 작업의 과정에서 작가가 이미지들을 시각화하는 방식은 컴퓨터상에서 만들어낸 어떤 이미지를 3D 프린터를 사용하여 입체적인 대상으로 변환시키는 것을 기본으로 한다. 이러한 변환의 결과물은 표면적으로는 조형 예술에서의 조각이 만들어온 작품과 유사한 형태를 가지고 있지만 3D 프로그램의 렌더링 과정에서 만들어지는 이미지는 이를 지탱하기 위한 구조가 없는 텅 빈 가벼운 것이다. 예를 들면 초기의 작업은 <텅 빈 돌>, <유령 조각>에서와 같이 크로마키 기법을 사용하여 자신이 만들어 낸 대상들이 눈앞에는 존재하지만, 화면에서는 사라져 버리는 현상을 유발하거나, <물의 겉면>, <불의 표면>과 같은 영상 작업에서는 철저하게 그래픽으로 만들어낸 가상의 물과 불의 그 표면만을 최대한 실제와 같게 표현하는 데에 집중하기도 하였다. 작가는 이러한 작업을 통해 실제와 가상의 경계 사이에 존재하는 유동적인 이미지의 형태를 관찰하고 있다. 어떤 대상을 정확하게 파악하기 위해서는 시각을 포함한 다양한 감각을 사용한다. 하지만 그는 그중에서도 오롯이 시각에 머무는 대상의 표면에 집중하고 있다. 이렇게 어떤 대상을 인식하기 위해서는 사용하는 시각은 ‘나’와 보는 것과 보이는 것 사이의 일정한 거리가 필요하다. 여기에 더해 우리의 시각 범위에 들어오지 않는 부분은 기존의 정보에 의존하여 가상의 것을 상정해 놓고 보이는 부분과 조합해 나간다. 그렇지만 작가는 이를 단순히 실제와 가상을 대조하는 비교를 통해 인간이 가진 감각의 한계와 오류를 지적하기 위해 사용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여기서 더 나아가 작가는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은 어떻게 형상화되고 인식하게 되며, 이로 인해 우리가 보게 되는 것은 진정으로 무엇인가에 대한 의문을 가지고 있다. 이렇듯 초기의 작업에서는 대상이 가지고 있는 표면에 대한 연구를 집중한다. 따라서 그의 작업의 방향은 지금과 같이 이미지가 넘치고 끊임없이 변화하고 미끄러지는 세상에서 비물질적인 형태와 이미지의 표면이 가진 본질을 최대한 드러내고자 하기 위함이다. 이제는 이러한 것들을 염두하고 이번에 새롭게 선보이는 <Archetype>과 <Imagery>를 살펴보도록 하자.
이번 전시에서 작가는 영상 작업인 <Imagery>와 3개의 조각 작업인 <Archetype>를 선보인다. <Imagery>는 말 그대로 형상화라는 의미이다. 작가는 자신의 머릿속에 존재하는 무형의 심상이 구체적인 상태로 점차 변환되는 창작 행위를 통해 형상화되는 과정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영상에 나오는 형상은 컴퓨터 프로그램의 기본 도구인 점, 선, 면을 자유롭게 이어나가면서 구, 육면체, 토러스와 같은 기본 단위에서 시작하여 공기나 물의 흐름과 같은 여러 힘의 작용을 바탕으로 완성되었다. 이는 선으로 끊임없이 이어지거나 선과 면 혹은 면과 면이 서로 교차하면서 변형하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이들의 형태는 서로 유사한 유기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또한 뒤에서 살펴볼 조각 작품의 모티브가 되는 형태로 보이기도 한다. 여기서 작가는 대상을 인식하는 눈에 광학적으로 가장 중요한 빛을 강조하기 위해 검은색으로 영상을 제작하였다. 그에게 본다는 것은 우리 눈의 빛 반응에 의한 것으로 대상의 존재나 형태적 특징은 비물질적인 빛의 밝기와 각도에 따라 동일한 것도 다르게 인식한다. 따라서 작가에게 있어 형상화는 창작자로서 작가의 의도를 담은 자의성과 인공성을 기반으로 시작하지만, 어느 순간에는 외부적인 요인에 의해 이러한 틀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우연성을 가진 것으로 쉽게 변모하는 것이다. 이제 영상 앞에는 있는 조각 작품인 <Archetype>으로 넘어가 보자. 이는 전형이라는 의미로 칼 융이 사용한 개념으로 보면 개인이 개별적인 존재로 획득한 것이 아니라 인간의 집단 무의식 속에서 공통되게 나타나는 보편적인 이미지를 뜻한다. 말 그대로 이 세 작업은 우리가 어디서 본 것 같은 추상적인 형태를 보여준다. 이들은 마치 바람, 불, 물과 같은 자연적인 요소에서 모티브를 가지고 온 것 같은 형태를 가지고 있다. 이는 작가가 3D 프로그램으로 모델링 작업을 하고 흙과 철을 사용하여 일반적인 조각을 만들어 내는 방식으로 제작한 것이다. 그가 다루는 디지털 이미지는 물론 기본적으로 우리가 조형 작업을 할 때 사용하는 지지대나 구조물은 없지만, 엄청난 양의 데이터의 구조가 축적되어야 소위 말하는 실제와 비슷한 모습을 구현할 수 있다. 그렇기에 텅 비어 있는 것 같은 화면 속 이미지도 결국은 어떤 구조 위에서 드러나는 방식은 유사하다. 따라서 그가 추상적인 형태로 만들어낸 조각은 여전히 디지털 이미지를 재현한 것이지만, 작가의 무의식에서 떠오르는 무형의 상태에서 어떤 구체적인 이미지로 나타나는 것을 시각화하는 전형적인 조형 예술의 창작 과정에 기인하고 있다. 그렇지만 실제로는 이 조각들은 영상에서 나타나는 이미지들이 파생한 결과물로 근본적으로는 영상과 같은 데이터 값을 지닌다. 다만 제작에 있어서 주물 과정과 같은 수작업을 거치며 원본과는 미묘한 차이가 발생하는 것이다. 그는 이렇게 여러 경계를 넘나들면서 표면의 것과 이면의 것의 다르면서도 유사한 관계를 통해 우리가 어떤 이미지의 형태를 통해 느끼는 비물질적인 감각에 관해 이야기한다.
이러한 작업에서 작가가 중요하게 사용하는 요소는 빛과 ‘마나’다. 작가가 생각하는 빛은 우리의 시각이 어떤 대상의 형태를 파악하여 인식하는 기본 요소이다. 우리가 바라보는 응시의 대상은 빛의 각도와 밝기에 따라 형태와 질감이 다르게 인식된다. 따라서 그에게 어떤 이미지가 가진 형태의 비정형적인 움직임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우리의 시각 그 자체가 아니라 그 대상 스스로 달라지고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그의 지금까지 작업에서 보이듯이 우리가 마주하는 표면에 대한 인식은 결국 인간의 주체적 시선을 포함하여 다수의 흐름에서 비롯되는 것이며, 사물 그 자체는 언제나 동일한 것이 아니라 항상 다른 것이 되어가는 유동적인 상태임을 알 수 있다. 그렇기에 이러한 작가의 생각의 연장선에서 본다면, 그의 작업은 우연적인 감각 성질로 표면을 만들고 이를 강조함으로써 오히려 그 실재적 특성을 드러내고자 하는 성향을 보여준다. 이를 위해 이웅철은 이번 전시에서 작품들이 공간 안에서 하나의 풍경으로 인식되도록 의도하였다. 2D의 공간에서 끊임없이 움직이는 영상 이미지와 실제의 공간에 자리 잡고 있는 고정된 조각의 형태는 서로를 마주 보며 수축과 팽창을 하는 긴장된 상태로 보인다. 이는 반복적으로 서로가 연결된 순환의 구조를 가지며, 여기서 우리는 응시하는 하나의 대상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대상과 대상 사이의 비어진 공간에 위치하게 된다. 이 공간에서 우리는 이미지가 실재하는 사물로 나타나고 이러한 고정된 형태가 다시 유동적인 이미지로 변화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새로운 감각을 느끼게 된다. 여기서 작가가 다루는 또 다른 요소가 바로 ‘마나’이다. ‘마나’는 게임 안에서 사용되는 생명력과 다른 무형의 힘이다. 이는 우리가 말하는 흔히 말하는 기(氣), 아우라와 유사하다. 이러한 개념을 빌려 작가는 우리가 사는 차원을 넘나드는 시대에 물질과 비물질적인 것 사이에서 발생하는 이미지의 변화 과정을 우리 눈에 보이지 않지만 존재하고 있는 가상의 마나가 구현되는 과정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그는 디지털과 아날로그를 오가며 만들어지는 이미지를 통해서 이러한 감각을 느끼는 것이 가능하다고 판단하고 있다. 이렇게 작가가 사용하는 마나의 개념은 결국 물질과 비물질이 교차하는 영역을 다루고 시각화하는 매개체의 역할을 의미한다. 이러한 작가에 시선으로 본다면 전시장에서 나타나는 시공간은 고요하고 정적이지만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들이 끊임없이 분열과 융합을 반복하는 장소이다. 그리고 이는 작품을 보는 나를 포함한 모든 감각적인 것이 유발하는 것이 융합된 것의 형상화이다. 따라서 그가 보여주는 표면은 단순한 외피가 아니라 감각의 복합체로 볼 수 있다.
결국 그가 이러한 작업을 통해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과거에서부터 구축되어온 전형적인 조형 예술의 이미지의 형태와 새롭게 만들어지고 있는 디지털의 이미지 형태는 형상화의 과정은 전혀 다른 것이 아니라 같은 연장선 안에서 전형적인 과정이라는 점이다. 따라서 그에게 중요한 것은 이미지의 형태가 형상화되는 것은 ‘나’의 주체적 시각을 바탕으로 한 인식에 머무르지 않고 다양한 감각들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찰나적으로 존재하는 일시적 시공간으로 보는 태도이다. 다시 말하면 지금과 같이 멈추지 않고 유동적으로 변화하며 차원의 경계를 넘나드는 시공간의 구조에서 비물질적 감각들로 이루어진 이미지는 진정한 또 다른 주체가 될 수 있는가를 우리에게 묻고 있다. 그리고 이는 인간이 역사적으로 축적한 감각에서 벗어나 이미지 그 자체에서 발견되는 것을 통한 관계성을 동시에 획득하게 되었을 때야 비로소 우리가 형상화하는 진정으로 유동적이고 자유로운 형태의 존재로 나타날 것을 자신의 작업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그렇기에 우리가 그의 작업에서 보는 바로 그것은 이러한 가능성을 타진하는 실험의 결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