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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터로서의 자연

: 가짜 진짜와 진짜 가짜의 수사학(修辭學)

안진국(미술비평)

 

“혼자서 멍청하게 앉아 있으면 화면에 무작위로 튀어나오는 자연이 너무 예뻐서 그걸 갖고 싶다고 생각하게 된다”

-  황인찬의 시 「화면보호기로서의 자연」 중 일부

 

   자연스러운 말과 행동을 위해서는 많은 연습이 필요하다. 자연스러운 연기 뒤에는 수많은 연습이 있고, 자연스럽게 노래를 부르기 위해서 여러 번 반복해서 어색한 부분을 매끈하게 고쳐야 한다. 공식 석상에서 어떤 내용을 자연스럽게 발표하기 위해서는 치밀한 준비와 여러 번의 연습이 필요하다. 의문이 든다. ‘자연스럽다’는 것이 정말 자연스러운가? ‘자연스러운 것’이 가장 부자연스러운 건 아닌가? 비물질적 차원을 물질적 차원으로 옮겨와 보자. 자연물과 인공물은 구분되는가? 나무를 잘라 의자를 만들면 그것을 완전한 인공물이라 단언할 수 있는가? 자연에 분해되는 플라스틱은 인공물인가, 자연물인가? 그게 분해되었는데도 여전히 인공물인가? 인위적으로 만든 것이 인공물이라면, 정원사가 관리하는 나무는, 농부가 기르는 농작물은, 집 안에 있는 작은 화분 속 꽃은 인공물인가? 옥수수에서 추출한 성분으로 만든 3D 출력물을 단지 인공물로만 봐야 할까? 이웅철은 말한다. “대부도는 분명 섬인데, 도로로 연결되어 있어, 섬이 아니잖아요. (…) 양면적인 모습을 가지고 있어요. 이런 상황이 이번 작업을 유발한 듯해요.”(작가 인터뷰)

 

녹아내린 경계, 모호해진 상황

   이웅철은 현실과 가상, 실제와 착시, 자연과 인공, 필연적과 임시적, 자연스러움과 부자연스러움의 경계가 어긋나고, 교란되고, 침투하고, 무너지고, 녹아내리는 상황에서 형성되는 어떤 모호함에 관해 끊임없이 질문해왔다. 그는 플라톤에서 시작하여 데카르트에 이르기까지 끈질기게 제시되었던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존재하는) 이분법적 세계관을 향해 지속해서 물음을 제기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섬 속의 섬⟫이라는 이번 전시명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그 질문은 현재진행형이다.—‘섬 속의 섬’이란 말 자체가 ‘우리가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가진 의미의 모호성을 함축적으로 드러낸다.—

   그의 이러한 물음은 근래에 형성된 것이 아니다.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2016년으로 보이지만, 거슬러 올라가면 2009년까지 소급할 수 있다. <Dark Polygon> 연작(2016)이나 <무감각의 병리> 연작(2017), <Color-field Relief> 연작(2018)은 가시적인 이미지뿐만 아니라 비가시적인 실체의 실체와 착시에 관해 질문을 던졌다.—<Dark Polygon>는 레이더를 교란해 실체를 숨기는 스텔스기가 모티프였고, <무감각의 병리>는 이미지 과잉으로 뉴스 보도의 참혹한 이미지에도 무감각해진 병리적 상황이 모티프였다. 특히 후자는 교통사고의 현장을 무덤덤하게 지나가는 상황, 가짜 소리에 대한 기억이 얽혀 있는 2009년 작품 <Hy-Fi>와도 연결되는데, 이러한 문제의식이 오래전부터 있었음을 알려준다. 다만 <Color-field Relief>는 시각적 착시에만 집중하고 있어 다른 연작에 비해 내러티브가 약하다.— 그리고 <현실의 기하학> 연작(2017)은 자연스러움과 부자연스러움, 혹은 필연적 행동과 임시적 행동에 대한 고민을 보여줬다.—‘사용자 경험 디자인’(UX design)이 가진 정치적 요소를 드러내기 위해 물리적인 불편함을 감지하도록 오브제를 변형했다.— 이런 문제의식은 안무가 양은혜와 협업한 영상 작업 <안무; 드로잉과 설계 사이>(2018)로 이어졌으며,— 이 작업에서는 공간의 동선에 순응과 이탈의 반복, 정지 이미지와 움직이는 영상의 교차, 문자 언어와 동작 언어의 변환 등으로 필연적과 임시적, 자연스러움과 부자연스러움의 모호함을 드러냈다.— 한강을 통해서 자연과 도시(자연과 인공)의 교차를 드러낸 <Greeting>(2018)로 나아갔다.—천(川)과 한강이 만나는 합수부를 남녀의 관계로 은유하여 서로의 공간을 파고들어 가는 양상을 보여줬다.— 그리고 최근에는 현실에서 발견한 형태가 수치화되어 입출력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불가피한 오류에 물음을 던진 <아이스크림 콘크리트>(2019)를 내보였고, 현재는 현실과 가상, 실제와 착시의 문제를 블루스크린 기법으로 보여주는 <유령 조각> 연작(2020)을 준비 중이다.—블루스크린 기법을 사용하여 현실에 존재하는 오브제가 실시간 촬영 화면에서 사라지는 상황을 연출한다.—

   특히 <Greeting>은 자연환경과 인공환경의 섞임을 보여줬다는 측면에서 이번 ⟪섬 속의 섬⟫ 전시와 유사한 질감을 보인다. 어떻게 보면 이번 전시의 파일럿 작업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자연과 인공이 서로를 침투해서 결국 자연도 인공도 아닌 상황, 그 경계가 녹아내린 상황은 이번 전시의 전체를 관통하는 아이러니한 장면이다. 수조 속에 담긴 ‘돌’은 돌이 아니고(<섬 속의 섬>), 암흑 우주 공간을 떠도는 듯한, 또는 백색 배경에 덩그러니 존재하는 ‘돌’도 돌이 아니다(<Surface #1>). 쉼 없이 출렁이는 ‘바다’도 결코 바다가 아니다(<Surface #2>). 이 모두 비물질적인 데이터 덩어리다. 가상이며, 착시이다. 그런데 정말 그런가? 자연물보다 더 ‘자연스러운’ 이 형상들을 전혀 자연물이 아니라고 할 수 있는가? 인식의 교란과 시각적 착시, 심리적 저항이 복잡하게 얽혀 있는 국면이 해일처럼 밀려온다.

 

인공 자연물

   이번 전시는 인공의 자연에 대한, 혹은 자연의 인공에 대한 레토릭이라 할 수 있다. 섬이면서 섬이 아니기도 한 대부도에서 발견한 돌들을 3D 스캔을 해서 0(off)과 1(on)의 비물질적인 디지털 데이터로 변환한 후, 그것을 다시 3D 프린팅한 입체적인 돌과 2D 프린팅(인화)한 돌 사진으로 물질화한다. 그 과정은 ‘돌(자연물; 물질) → 돌(인공, 데이터; 비물질) → 돌(인공, 입체물 & 사진; 물질)’이다. 모두 ‘돌’이지만 그 층위와 상태가 다르다. —물질 → 비물질 → 물질, 혹은 자연물 → 인공물 → 인공물— 여기에 (섬 아닌) 섬을 둘러싼 바다를 상기시키는 출렁이는 바다 영상(<Surface #2>)과 물을 떠올리는 수조가 덧붙여지고, 옥수수 성분의 3D 프린터 필라멘트로 ‘돌’(이하 옥수수 돌)을 3D 프린팅 하면서(<섬 속의 섬>) 상황은 복잡해진다. 거기에 돌들 옆에 그 돌의 이름처럼 숫자까지 붙어 있다(<Surface #1>).

   작업들의 면면을 보면 그 속성을 쉽게 파악할 수 있을 것 같이 느껴진다. 3D 프린터 출력물은 인공, 수조 안에 물은 자연, 물 영상은 인공, 돌 사진은 인공, 옥수수는 자연, 돌은 돌, 물은 물, 데이터는 비물질, 실체가 있는 것은 물질… 섬을 섬(돌)과 섬 바깥(바다; 물)으로 서로 다른 물질 상태를 따라 구분하듯이(이원론), 전시의 작품을 돌과 물, 자연과 인공, 물질과 비물질로 구분하는 것은 그리 어려워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섬 속의 섬’이라는 명명(일원론)은 전혀 다른 층위로 물질의 상태를 끌어올린다.—섬 속의 섬 바깥은 섬이다. 그리고 섬을 품고 있는 큰 섬의 바깥이 바다라고 우리는 단언할 수 없다. 섬 속의 섬의 바깥이 섬이듯, 그 큰 섬의 바깥에도 더 큰 섬이 있을지도 모른다. 혹은 대부도처럼 섬이 아닌 섬일 수도 있다. 바깥의 어느 축은 도로가 있을지도…— 이 층위에서는 섬과 바깥의 경계가 흐리고 구분이 모호하다.—이런 면에서 그는 스피노자를 따르고 있다. 분리나 구별이 아닌, 일원론적 일체감을 고민한다.— 분명 속성별로 객체를 떼어내어 구분할 수 있지만, 그 객체들은 언제나 뒤엉켜 있다. 그래서 돌과 물을 구분할 수 없고(물속에 들어 있는 돌 / 조금씩 물에 녹는 옥수수 돌), 자연과 인공을 분리할 수 없고(옥수수 돌 / 오직 데이터로만 구현되었지만, 현실 바다보다 더 생동감 있는 바다 / 자연의 돌을 그대로 스캔해서 만든 돌과 돌 사진), 물질과 비물질을 구별할 수 없다.—데이터 출력물인 옥수수 돌과 사진은 물질이다. 영상은 비물질이지만, 그것을 상영하는 모니터는 물질이다. 그렇다면 눈에 보이는 비물질은 전시에 존재하지 않는가? 정말 없는가? <Surface #1>의 돌들 옆에 꼬리표처럼 붙어 있는 숫자는 무엇인가? 물질의 표면을 타고 흐르는 데이터의 흔적들은 비물질을 계속 상기시킨다.— 구분하기 쉬운 대상이 어느 순간 구분되지 않고, 서로가 서로를 침투하며, 우리의 고정관념을 교란한다. 작가에게 인공과 자연, 물질과 데이터, 가상과 현실, 실제와 착시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바로 이것이다. 이 두 범주의 모호성, 뒤엉켜 있는 상태 그 자체. 작가에게는 그곳이 이 모든 전말이 벌어진 사건 현장이다.

   이웅철은 면사무소였던 에코뮤지엄에 “이 작업들이 그곳에 원래 있었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녹아들었으면 좋겠다”라고 말한다(작가 인터뷰). —이 전시공간은 역사적 유물과 주민 편의 시설이 공간의 일부를 차지하고 있다.— 이전(“원래 있었던 것”)과 이후(“이 작업들”)가 분절 없이 엮여 있길 원한다. 시공간성이 문턱 없이 이어지길 희망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그가 분절을, 문턱을 마치 없는 것처럼 덮어 은폐하길 원한다는 말이 아니다. 도리어 그는 그 분절을 꿰맨 자국을, 문턱을 깎으며 생긴 둔탁한 흔적을 더 적극적으로 드러낸다. 이러한 작가의 작업방식은 경계가 사라진 사건 현장이 지닌 의미를 사유하도록 우리를 이끈다. 과연 당신은 무엇을 보고 있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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