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시대 정신의 축조, 그 불가능의 가능성
‘동시대성(contemporaneity)’의 개념을 당대에 주목하는 여러 이유 가운데서도 기술의 발전상이란, 그중에서도 해당 기조의 실현을 향한 꽤 비중 있는 근거가 되어주었다. 특히나 문화와 예술이라는 좀 더 구체적인 범주 내에서는 아날로그로부터 디지털로 전개된 시대 전환의 현상이 소위 ‘동시대 미술(Contemporary Art)’이라는 용어와 그 개념을 출범케 한 바도 있다. 일반적 미술의 범주에서 통용되던 미적 표현을 위한 재료들은 그 유용의 가치를 일부 상실하기도 했는데, 이는 평면 층위에서의 종이, 천 등을 입힌 캔버스 위에 물감으로 그리는 일반 회화의 방식이나 다양한 재료들의 물리적 가공의 형태로 이뤄진 입체 층위에서 조각 및 설치의 매체에 이르는 모든 미적 표현의 양식이 (물론 가상의 시공에 한정될지언정) 스크린이 매개하는 컴퓨터 기반의 디지털 환경의 이미지 구축 방식 안에서 시도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이미지, 시각 구조, 나아가 인식 체계를 관장하는 일련의 생산 및 유통 체계의 변화는 곧 당대라는 차원의 의미를 급격하게 부상케 했다. 더불어 고도화된 저장 매체와 네트워크 웹 포털의 등장은 정보 전달의 수행 방식을 획기적으로 발전시켰고, 따라서 그와 연관한 이상의 이미지, 시각 구조, 나아가 인식 체계를 시의적으로 형성하는 과정이자 산물로서 새로운 ‘시대정신(Zeitgeist)’의 필요성을 모두가 절감하기에 이른다. 독일의 관념론 철학자 헤겔(Georg Wilhelm Friedrich Hegel, 1770–1831)이 《역사 철학 강의(Vorlesungen über die Philosophie der Weltgeschichte)》(1837)에서 제안한 이 시대정신의 개념은 본디 한 시대의 종국 이후에야 알 수 있는 후과적 결과물로서 밝혀지는 것이었지만, 세계를 이루는 구조의 축조를 거의 시차 없는 동시적 공정으로 시행할 수 있게 된 작금의 상황에 힘입어 그러한 시대정신을 당장에 의지할 수 있는 무엇으로 인식하는 것이 이 동시대의 시대에 가능해 지고야 말았다.[1] 이러한 양상은 이전의 것에 비해 한층 주체적인 자아의 태도를 자연스레 출현시켰고, 이 신주체들에 의해 의지된 세계는 극단적인 낙관주의적 다양성을 전제하는, 이른바 포스트모더니즘의 문화사적 경향성을 한 번 더 모더니즘의 그것과 유비하는 형태로 회귀하게 하는 결과를 낳았다. 유의해야 할 것은 이미 한 차례 다양성을 선제한 동시대성이라는 개념이 이미 순차적으로 출범한 이상, 이제 그 결과라는 것이 무엇이 더는 옳고 그름 또는 맞고 틀림의 문제로 귀결하지 않게 되었음을 명확히 해야 했다는 거다. 설령 이들 동시대 주체가 모더니즘과 유사한 형태의 목표를 설정하고 있을지라도, 변화의 요인을 감내하는 방식의 차이에 의해 실제로는 전혀 다른 체제를 일으킬 수 있으므로 동시대의 시대정신이란 것이 애초에 과거의 어떤 동향성과도 태생적으로 다른 것일 수밖에 없음을 방증한다. 그리하여 동시대에는 바로 다시금 구축의 논리가 중요하게 떠오른다. 이는 수정이나 재편의 논리와는 또 다른 무엇으로, 문제를 인식한다는 행위에 그 수행의 방점이 있다는 게 특징적이다. 이로써 왜 동시대를 특정해야 하며, 이를 위해 무엇을 또한 어떻게 실천할 것인지가 미술에서도 주요한 논점으로 받아들여졌다.
이웅철의 작업은 이상의 논제를 아우른다. 결국 무엇이 지금의 시대를 결정짓고 있는지, 혹은 그 결정의 논리가 개개의 주체인 구성원들의 당대적 삶에 빗대어 합당한 것인지, 그러거나 또는 그러지 못할 여지가 있다면 올바른 척도의 기준은 무엇이 될 수 있는지 그리고 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근본적 사유를 함의한다. 이웅철의 작업에서 또 하나의 핵심은 시각적 표상의 지지체이면서도, 동시에 그와 같이 외연의 형상에 한정하는 추종 가치와 그것의 미적 개념에 일정 수준의 합당한 의미를 부여하는 것일 테다. 이는 재료, 나아가 매체라는 차원 역시도 창작 주체의 심상을 투사하는 어떤 구성을 이루기 위한 일부분으로서 기능하는 하나의 축을 담당하는 것이기 때문이며, 특히나 작가의 경우 작업의 수면 아래 가라앉은 무거운 의식이 작품의 기저를 강하게 떠받치고 있기에 그러한 형식–개념 / 개념–형식 사이의 구도와 그 특징을 파악하는 것이 본인 작품의 이해에 큰 영향을 미친다. 말하자면 동시대의 미적 의미와 그 가치의 정렬을 통해 개인의 삶으로부터 집단적 사회의 범주를 관통하는 일종의 작동 기제와 원리를 돌이키는 것이 작가 작업에 있어서는 중요하다고 할 수 있겠다. 특정 대상이나 각종 현상의 연속으로 규명 가능한 현실에 실재하는 형이상학적 조직 구조의 작용 과정(mechanism)은 개인들의 이해관계에 의해 구축되는 것이면서도, 또한 집단과 그 소속 구성원들에게 제 형성에 있어 재귀적인 개입을 상호 합의해 낸다는 점에서 주목해야 한다. 그러한 속성으로 인해 이 메커니즘의 양식은 연쇄의 굴레를 따라 생성과 소멸의 순환을, 더불어 다시금 소멸과 생성의 근거를 영속적으로 조직한다. 해당 구조를 조정하려면 이를 거시적으로 조망할 수 있는 상황의 배율, 이 실천을 위한 특별한 사유가 요구되는데, 시청각의 감각을 구동하게 함으로써 예술작품은 필요한 균열이자 시발의 계기가 되기를 기대할 수 있다. 개별의 작품은 그 자체로 독립적인 주제를 상정하는 데 있어–그것이 얼마나 좁거나 넓고 얼마나 얕거나 깊건 간에–해당 작품을 구조하는 형식과 내용 사이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하는가에 따라 그 유효함의 논리는 이질해 진다. 이웅철의 작업 역시 이처럼 매체의 속성에 따른 성격의 규정을 그리고 다원적 형태의 매체 활용의 방식을 결정하는 데부터 이로부터 기술해 가는 서사의 존재가 곧 자기 특성을 조직게 한다. 더불어 작가의 작업을 경험하는 관람 주체의 행위와 목적도 역시나 그와 같은 원리와 연동하면서 제 존립 근거를 구체화하는 것에 일조한다. 이러한 구조가 이웅철의 작업 세계에서는 유일의 단위 구조가 된다. 복수 서사들의 존재를 매체의 차이로 환원하고, 하나의 작업에서 등장하는 복수 매체 또는 서사는 그것이 발아할 수 있게 하는 재구조화의 구조를 격자로 이루려 한다. 이 은하계를 부유하도록 허가받은 것은 오로지 관람자로, 이들은 자유롭게 작가가 출범시킨 각기 다른 세계관들을 택하거나 택하지 않고, 연결하거나 단절함으로써 (비)동기화할 수 있다. 계속해서 진행하거나 멈출 것을 선택하는 이도 종국엔 관람 주체들뿐이다. 작가와 관객은 이처럼 자발적 의지가 가능한 세계 안에서 어떠한 방식으로든 그들의 관계를 설정하도록 짝지어졌다. 작가 서사의 완성은 그렇게 자기 의미와 가치를 확인한다.
이웅철의 작업 세계를 아우르는 주요한 기반은 바로 신체성이다. 이때 신체성이라 함은 결국엔 신체라는 매개를 통해 감각, 즉 외부로부터 전해지는 일종의 물리적 자극의 의미가 생성되는 지점으로서의 신체, 그리고 종국에 형성된 인간이라는 존재를 자기 규명하는 의식 차원의 변화를 야기하는 촉매로서의 속성을 뜻한다. 초창기 작가의 작업에서는 이와 같은 신체성이 특정한 장소의 지표와 교차하며 드러난다. 2018년의 영상 작업 〈안무; 드로잉과 설계 사이〉에서는 도심의 신축 건축물의 특정성을 감각하는 신체와 그 소회를 장면 밖에서 들려오는 독백의 형식을 빌려 전해진다. 해당 작품에선 신체가 놓인 어떤 장소가 신체성의 발현을 위한 틀의 구조를 자처했다면, 2019년 작 〈동요하는 걸음〉에서는 명료한 지침의 내레이션이 사라지고 신체의 수행성을 극대화하는 환경으로서 갯벌의 장소가 채택되며 관람자로 하여금 그들이 오롯이 등장인물의 신체 움직임에 집중할 수 있게 하는 동시에 등장인물이 표상하는 인간의 존재와 그를 둘러싼 배경이자 세계로서 자연의 관계를 조명한다. 더불어 그것이 전시의 형식 안에 자리할 때, 보행자의 용이한 통행을 위해 설치하는 인도 포장용 보도블록을 상기하는 오브제들을 공간에 배치하면서 장소성에 따른 신체성의 발현을 더 적극적으로 사유하기를 종용한다. 이웅철이 그의 주변을 탐색하는 방식은 무작위적이다. 하지만 이는 단지 ‘척도 없음’의 무질서함과 관련 있기보다는, 전체의 구조를 순차적으로 인식도록 하기 위해 보통의 일상에서 포착 가능한 사소한 계기들을 실마리로 삼는 것에 맞닿아 있다고 하겠다. 다만 이상의 감각을 실제 현장에서 전유하는 방식을 제안하는 데 물적 오브제나 현상의 증거들을 수집하고, 그것을 필요하다면 본래의 성질과는 무관하더라도 당사 매체와 그에 덧입혀진 개념의 차원에서 발생 지점에서 변경 지점으로 이전시킨다. 그의 작업에 적용된 일련의 방법론에서 특기할 만한 건 작가가 일으키는 신체성의 발현은 전통적 철학의 범주가 아닌, 바로 동시대적 조건을 두고 현시한다는 거다. 이렇듯 플라스틱의 자연 분해를 실험한 〈섬 속의 섬〉(2020)은 내용의 측면에서, 〈물의 겉면〉(2020)과 〈불의 표면〉(2021)은 형식의 측면에서 컴퓨터와 디지털 그리고 네트워크의 생태계가 구축한, 이른바 가상의 시공에서 자연도 인공도 아니면서 또한 자연도 인공이기도 한 ‘유사–대상’을 다룬다. 그의 작업에서 감각은 공감각적인 착시이자 환영의 층위로 접어든다. 그렇게 조장된 체제의 건조를 소위 견본의 영역에서 행하고, 그 연출에 있어서도 가능성의 영역과 연관하는 일종의 ‘모델하우스(show house)’ 형을 차용해 체제나 구조의 견고성에 의문을 표한다. 그런가 하면, 현실과 가상의 경계를 표지하는 크로마키(Chroma Key) 영상 합성 원리를 끌어와 실제 물성의 수치로 책정된 푸른 조각을 영상 매체를 거쳐 내 비가시의 것으로 치환해 버린 〈유령 조각〉(2020)이나 이와는 역의 방향에서 영상의 범주에서만 실재한다고 할 수 있을 이후 효과(after effect)의 기법으로 가시화한 가상의 효과 이미지와 이 스크린 너머의 비현실적 평면 이미지를 현실에서 실재하는 삼차원의 입체 조각으로 출력해 보이는 〈이후 효과(원제: After Effect)〉(2021), 그리고 증강 현실(Augmented Reality)의 기술을 활용해 무의 양식으로부터 유의 개념을 창출하는 〈여섯 조각들(원제: Six Parts)〉(2022)에 이르기까지, 이웅철의 미적 실천을 기반하는 지각은 모리스 메를로–퐁티(Maurice Merleau-Ponty)가 주창한 의식과 신체 사이의 관계를 현상학적 매개로 규명하고자 한 본질 탐구의 방식과 상당 부분 유비한다.[2]
이웅철은 이처럼 권력이나 권위로 포장된 구조의 본질로 우리의 시선을 돌린다. 체제에 대한 끊임 없는 의심은 무한한 관찰의 범위에서 깊은 문제의식을 싹 틔웠다. 그렇다고 그의 작업이 특정한 정치적 노선 또는 진영을 견지하고 있음을 구체적으로 밝히거나, 그것을 따르라 부추기는 것은 전혀 아니다. 작가는 인간과 자연의 어쩌면 부조리하다 할 수 있을 관계 설정을 되짚어 보는 것으로부터, 가상과 현실, 실재와 환상, 진짜와 가짜 등과 같이 상충하는 무엇들 사이의 개념을 해제할 따름이다. 이로 인해 분명해질 수 있는 건 당장에 물적 세계의 극단인 형이상학, 다시 말해 형식이 아닌 개념의 단계로 충분히 실현할 수 있음을 자기 증명해 보인 시뮬라시옹을 동시대는 어떠한 태도나 입장으로 수용할 것인지의 문제다. 그리고 바로 이 과제를 직시하고서 할 수 있는 나름의 응답이 곧 그 시대의 정신이 된다. 시대정신은 그렇게 형성되기도 하고 형성하기도 한다. 시대정신을 세우기 위해 많은 희생을 감내하지만, 그것을 무너뜨리기 위해서도 사회의 구성원들 제 일신을 내던진다. 마치 지금은 절대적이라고 받아들여지는 여러 가치의 의미들은 역시나 생성된 것이므로 언젠가는 소멸할 수 있다. 당연하게 여기도록 한 이 순환 반복적 이치의 망각이 야기하는 당대의 시의적 과제를 직시하게 함으로써 이웅철은 원래는 불가능했을지도 모를 유효의 가능성을 마침내 발굴하려는 것이다.
장진택(독립기획자)
[1] 헤겔의 시대정신 개념은 또한 독일의 사상가 요한 고트프리트 헤르더(Johann Gottfried Herder, 1744–1803)의 민족정신(Nationalism)과도 연루돼 있다. 이에 관해서는 헤르더의 저서 『인류의 역사철학에 대한 이념(Ideas for the Philosophy of the History of Mankind)』(1784–1791)을 참조할 것.
[2] 해당 이론에 관해서는 1945년에 출간한 메를로–퐁티의 저서 『지각의 현상학(Phénoménologie de la perception)』을 참조할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