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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 철, 흙 : 비장소를 감각하기

정현 (미술비평, 인하대)

“아주 작은

세계를 녹여 만든 것처럼

다른 세계의 파편처럼

무거운

중심을 벗어날 수 없는 무게로

경계를 헝클어뜨리는 모래 속에" 1)

1) 김리윤, 「검은 돌 안에서」 발췌,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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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 «검은 돌과 다리미»(디스이즈낫어처치, 2023)는 이웅철 작가의 아버지의 젊은 시절 기억에서 비롯되었다. 개인적인 일화에서 출발하지만 그 배면에는 1970~80년대 한국의 국토개발계획을 위해 국가에 봉사한 해외 근로자의 이야기가 헐겁게 연결되어 있다. 치료를 위해 요양을 하던 차에 마침 사우디아라비아의 빈 살만 왕세자의 내한 소식을 듣고 오로지 아버지의 기억 속에 잠복하던 시간과 공간이 소환된다. 더불어 아버지는 자신의 질병이 중동의 힘든 삶에서 기인한 것이라는 합리적인 의심을 품었다. 그렇게 아버지의 중동 이야기가 작업의 근간이 된다. 아버지는 1970년대 말 이란의 건설 현장에 도착했으나 아마도 이란혁명이 일어나면서 한국으로 복귀한 후, 1980년에 다시 사우디아라비아로 근무지를 옮긴 것으로 추측된다. 감당하기 어려운 더위와 모래바람은 수시로 다른 풍경으로 등장했고 두려움은 마치 무덤에 들어간 것 같았다. 그의 당시의 이야기는 주로 다양한 차이에서 발견하는 심리적인 변화와 일상에 관한 것들이었다. 사실 한인 중동 근로자 파견은 1970년대 중동 건설 붐부터 현재까지 이어져오고 있다. 특히 산업화에 의한 한국 모더니티를 구축하는 데 있어서 중동 건설 붐은 결정적인 역할로 작용했다. 하지만 중동과 한국의 관계는 그들의 경제력과 우리의 노동력과 기술의 거래로 한정된다. 한인 중동 근로자의 삶과 당사자들의 목소리는 주로 국민의 희생을 딛고 성취한 국가주의의 서사로 가려진 듯하다. 여기에서 가족을 위한 가장의 숭고한 희생은 남성과 국가를 동일시하는 당시의 관념을 여지없이 반영한다. 그렇다고 이웅철의 작업이 국가와 개인의 관계를 직접적으로 다루지는 않는다. 다만 아버지의 기억을 통해 그의 삶을 거슬러가다 보면 마주칠 수밖에 없는 생과 사의 고비와 한국의 산업화 사이의 관계는 필연적으로 건너가야 하는 길목일 것이다. 전시의 표제인 “검은 돌과 다리미”는 시대를 표상하는 기호이자 당시 중동 근로자들의 견뎌낸 고된 시간의 전리품과 같다. 다시 말하면 노동이라는 물리적 행위와 교환된 일종의 ‘전시 가치’라 부를 수 있겠다.

 

 

비-장소로서의 중동

그의 이전 작업은 구체적인 기호나 상징이 두드러지지는 않았다. 다만 일종의 공통점은 발견되는데, 예컨대 영상 배경이 대부분 풍경이라는 점은 회화와의 연결고리를 가지고 있으며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흙, 돌, 철은 조각과 연결된 질료임을 유추할 수 있다. «검은 돌과 다리미»는 과거를 복원하거나 회상하기보다 중동이라는 장소를 더욱 ‘비장소화’한다. 개인의 짧은 일화는 어떤 위험을 감각하지만 중동의 실재와는 상당한 간격을 두고 있음을 포착할 수 있다. 이는 단지 아버지 개인의 시선뿐 아니라 중동 건설 사업에 관한 대부분의 서사는 영미권 국가와 경합하여 사업을 수주받는 과정과 이를 성공적으로 마무리함으로써 쌓은 신뢰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당시의 상황은 다음과 같이 묘사된다.

 

“당시 중동 국가 건설 붐은 대단했다. 넘쳐나는 오일달러로 도로, 항만, 공항 등 사회간접자본에 아낌없이 쏟아부었다. ‘베트남 특수’가 끝나고 오일쇼크를 겪으면서 뭔가 새로운 돌파구가 필요했던 한국에 오일달러로 흥청대는 중동은 ‘하늘이 준 메시지’였다. 1973년 삼환기업이 사우디아라비아 고속도로 공사를 따내면서 중동 진출 서막을 알렸다. 박정희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을 업은 기업들이 앞다퉈 중동으로 향했다. 1975년 7억 5000만 달러에 불과하던 건설 수주액이 1980년 82억 달러로 10배 이상 늘었다. 이 기간 한국 외화 수입액의 85.3%가 오일 달러였다. 근로자 수도 급증했다. 1975년 6000명이던 것이 1978년 10만 명에 육박했고 한때 20만 명에 달했다.” 2)

2) 경향일보 경향으로 보는 그때 1970~80년대 중동 건설 붐, 2015.04.21 21:09 입력

 

1970년대 석유 가격 폭등으로 인해 한국의 산업화는 지연될 수밖에 없었고, 이를 타파하기 위해 정부는 사활을 걸고 중동 진출에 임한다. 우리가 내세울 것은 베트남전을 통해 익힌 기술력과 근면성이었다. 근로자들은 공기를 줄이기 위해 쉼 없이 3교대 근무를 해야만 했다. 고통을 인내할 수 있었던 것은 가장의 책임과 무엇보다 상대적으로 높은 임금 덕분이었다. 당시 월급이 요즘으로 환산하면 1500만원 가량이었다고 한다. 한국의 근로자들은 가족, 국가, 미래를 위해 자신의 노동력을 제공할 뿐 중동과는 상대적으로 분리되어 있었다. 그렇다면 노동력과 재화의 거래만 존재하는 공간은 “비장소” 개념과 연결된다.

 

프랑스 사회학자 마르크 오제(.M.Auje)는 신인류의 삶이 전통적인 토대에서 벗어나 자율적인 이동과 소비 그리고 네트워크에서 보다 긴밀한 관계성을 가지게 된다고 보았다. 여기에서 비장소란 실존이 부재한 상태에서 오로지 거래와 계약만이 존재하는 비인간화된 공간, 그래서 긴밀한 관계가 부재한 상태의 공간이다. 요컨대 주거지와 대중교통 사이를 연결하는 대도시의 마을버스도 비장소화된 대상이다. 마을이란 유기적인 관계로 형성되어 교육, 경제를 상부상조함으로써 경쟁이 아닌 공생을 꿈꾸어야 할 것이다. 물론 자유주의 경쟁 체제에서 이러한 상도를 요구하는 게 어색해졌지만 말이다. 마을버스는 기호적으로는 지역 공동체를 표방하지만, 실상 마을 자체가 부동산의 가치로만 평가된다면 그곳은 비장소가 되었기에 마을버스는 그 자체로 부조리하다. 그렇다면 이상의 사유를 한인 중동 근로자의 삶과 연결해 보자. 1970년대 전후 대한민국 정부는 국가를 위해 국민의 희생을 요구한다. 파독 광부, 간호사, 멕시코 옥수수 재배 노동자, 베트남전 참전 등을 통해 한국은 재화를 모았고 이를 통해 국토의 산업화를 이룩할 수 있었다. 이후 1990년대경부터 다양한 이유로 해외에 거주하는 동포를 한국의 일부로 수용하면서 자연스럽게 디아스포라 연구가 시작된다. 이는 해외 동포를 범 한국인으로 포괄하는 정치적인 제스처였다. 시간이 흐르면서 국가의 호명이 아닌 당사자의 목소리가 조금씩 웅성거림을 만들어내기 시작한다. 다음 세대의 정체성을 다루는 인류학적 연구로 진화한다. 그런데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중동 한인 근로자의 목소리를 거의 소거되어 찾아보기 어렵다는 점이다.

 

한편 박완서는 소설을 통해 베트남 참전과 중동 건설 한인 근로자를 주제로 다뤘는데, 여기에서도 당사자의 목소리보다는 국가와 가족을 위해 타국 생활을 하게 된 남성 가장의 희생을 당연시하던 당시의 의식을 통해 개발주의와 황금만능주의가 배태한 인간성의 말살을 날카롭게 꼬집었다. 다만 이 과정에서 가부장적 권위로 표상되던 한국의 아버지는 가족을 위한 희생과 봉사의 객체가 되어 담론의 바깥으로 미끄러진다.3) 당사자의 목소리는 현재까지도 적극적으로 다뤄지지 않고 있다. 이유는 분명하다. 우리는 중동을 여전히 개발의 대상으로 바라보기 때문이다. 최근 들어 사우디아라비아 북서부 홍해 인근 사막에 건설되는 네옴시티 사업에 여러 한국 기업이 협업하면서 제2의 중동 건설 붐을 기대하고 있다. 중동 연구 역시 이러한 경향과 어느 정도 밀착되어 있는데, 인권, 종교, 정치지리학, 도시연구, 건설업 등의 주제에 비해 중동 근로자 당사자성을 드러내는 연구는 찾아보기 어렵다. 결국 이산과 노동의 문제도 규모의 경제학에 의해 생성된다는 상식을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된다.

3) 신수정, 「중동 건설 노동자 가족의 에토스 - 박완서 소설에 나타나는 공모와 균열의 양상을 중심으로」, 『우리말글』 2070집 우리말글학회, 2016, 참조 

 

물질과 비물질

그간 이웅철은 회화와 조각과 같은 전통 매체를 가상세계에 혼합하는 실험을 통해 물질과 비물질에 관한 질문을 지속해왔다. 기존의 사물을 3D 스캐닝하여 조각으로 복제하고 이를 가상세계에 적용시켜 현실과 가상 사이가 모호한 세계를 제시함으로써 그가 시각적 인식과 실재와의 관계를 탐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알다시피 아서 단토(A. Danto)는 앤디 워홀(A. Warhol)의 <브릴로 상자>를 보고 실제 상품과 작품 사이의 시각적 차이가 없음을 주목하며 ‘예술의 종말’을 선언한다. 당시 단토가 발견한 것은 시각적으로 차이가 없는 동일한 대상이 실제로는 다르다는 당연한 사실을 통해 철학적 사유가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푸코(M. Foucault) 또한 시각적 동일성과 차이에 관하여 질문한 바 있다. 그는 마그리트(R. Margritte)의 작업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를 통해 이미지와 문자의 관계를 되묻는다. 마그리트는 화가이지만 그렇다고 대상을 반드시 외형적으로 닮게 그려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푸코의 고민도 유사한 것을 특정한 대상으로 동일하게 분류하는 이른바 형태학(morpholy)의 방식이 가진 유형학적 분류를 지적한 것이다. 다시 말해 유사한 것들을 동일한 것으로 분류하여 인종, 언어, 문화 등을 고정하는 초기 서구의 인류학적 태도를 가리키고 있다. 나는 이웅철이 전통적인 매체와 그의 대구로써 가상세계를 대응하는 방식에서 물질과 비물질, 실재와 가상, 현실과 허구 사이에 존재하는 위계를 지우려는 시도가 아닐까 추측해 본다. 마그리트의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를 어떻게 판독하는 가는 그것을 보는 사람의 인식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결국 본다는 행위와 그것의 해석 사이에는 수많은 차이들이 발생할 것이며 따라서 그것을 하나의 해석과 의미로 고정시키는 것은 애초부터 예술의 성격과는 어울리지 않는 것일지도 모른다.

 

«검은 돌과 다리미»는 이웅철이 여태껏 뉴미디어 작업에 집중해왔던 기존의 틀에서 벗어나 영상, 설치, 시, 사운드, 퍼포먼스가 혼합된 다원적 방식을 통해 한국의 산업화 시기인 1970~80년대의 공적 기억과 아버지의 사적 기억을 교차시켜 한국 모더니티와 동시대 사이의 횡단을 시도한다. 작업의 시작은 작가의 아버지의 삶을 되돌아보는 것에서 비롯한다. 아버지는 1970~80년대 오일달러 파워로 형성된 중동 건설 붐을 타고 머나먼 타향으로 떠난다. 아버지의 기억은 당시의 상황을 구체적으로 기술하기보다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한 일화를 소개한다, 가장 의미 있는 시간이었던 중동에서의 기억은 상흔이자 역설적으로 훈장이었던 당시를 회고하면서 아버지를 통해 국민의 희생을 바탕으로 자본을 축적한 산업화 시기의 한국 사회를 가로질러 간다. 이 작업은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다른 세대, 다른 시간, 다른 경험 속에서 모종의 공통분모를 찾아내는 과정으로 90년대 이후 가속화된 사회적 시간으로 인해 급속도로 잊힌 모더니티의 기억을 되찾아가려는 시도이기도 하다. 다만 이 작업이 아버지의 기억을 재현하거나 재생하려는 의도로 구성된 것이 아님을 밝혀야 할 것 같다. 바꿔 말하면, 이 작업은 아버지의 경험과 기억에서 비롯되었지만 우리가 일반적으로 기대하는 회고적인 성격의 서사를 찾아보기는 어렵다. 오히려 이웅철은 <전망>(2023)에서 구체적인 기술이나 묘사 대신 분자적인 ‘추상성’과 리듬, 속도, 강도를 통해 관람객의 정동을 유도한다. 금빛 태양이 분유하듯 서서히 검은 끈적한 액체가 등장한다. 곧이어 금속성의 망치소리가 이어지고 사막 한가운데 비계가 세워지더니 곧바로 모래 덩어리가 형성되면서 황금색 돌이 공중에 나타났다가 곧바로 검은 액체가 되어 추락한다. 이렇게 하나의 장이 끝나자 곧바로 다리미가 등장하면서 새로운 장이 열린다. 공중촬영된 날 것의 땅을 지나자 떠오르는 태양이 녹슨 지구처럼 변하면서 사방으로 분해된다. 끝으로 황금색 골짜기에 정체를 알 수 없는 직사각형 금색판이 나타나면서 끝이 난다. 전시 공간 디스이즈낫어처치는 과거 교회 건물을 개조한 복합공간이기에 구조적으로 제단이 차지하는 비중이 크다. <전망>은 바로 제단이 위치한 벽면을 스크린으로 사용한다. 덕분에 이 영상은 마치 신화의 창세기나 프리퀄과 같은 느낌을 전달한다. 여기에서 이웅철 작업에서의 물질과 비물질에 관한 사유를 아버지의 기억과 연결하여 조금 더 나아가 보자. 신체 행위인 노동과 그에 대한 자본 가치의 재현이 가능한가? 예술가의 수행성과 달리 노동은 대부분 사회주의 이념으로 표상되어 왔다. 한편 이웅철은 <전망>에서 아버지의 기억을 모호한 원소적인 움직임과 사운드, 그리고 시인 김리윤과의 협업 <검은 돌 안에서>(2023)와 전시장에 설치한 비계에서 이뤄진 김석중의 퍼포먼스를 통해 재현하기보다 감각으로 전환시켜 신체와 감각의 관계가 나타나도록 유도한다. 비가시적인 국가 권력이 어떻게 개인을 통치했는지를 원소적인 방식으로 추적한다. 여기에서의 원소는 이웅철이 세계를 감각하는 하나의 미학적 방식이라 부를 수 있겠다. 작가는 아버지의 경험과 기억을 물질과 비물질의 경계에 위치시킴으로써 모호한 아버지의 정체성을 드러낸다.

 

검은 돌과 다리미

아버지는 우연히 검은 돌을 발견한다. 쉽게 절단되지 않는 걸 보고 운석의 조각이라는 믿음이 시간과 함께 굳어진다. 다리미는 당시 가장 선호하는 가전제품이었다. 해외 근로자들은 귀국할 때마다 각종 전자제품을 선물로 가져왔다. 황학동에 가면 아직까지도 1970년대의 다리미가 곧잘 거래되는 걸 알 수 있다. 중고거래 사이트의 상품정보에 월남전에 참전한 고모부가 가져온 다리미로 빈티지임을 강조한 문구가 눈에 들어왔다. 국가를 위해 젊음과 생명을 담보로 타국의 전장으로 떠나서 번 돈으로 구입한 이 전리품은 이제 빈티지, 레트로, 당시의 기억을 상기시키는 상품 가치로 재전유되어 하위문화의 일부가 된 듯하다. 또 다른 관점으로 다리미라는 사물은 추억 혹은 ‘희귀템’이라는 감성적 비물질성을 통해 생존하게 된 것 같다.

 

그렇다면 검은 돌은 어떠한가? 사실 아버지의 기억에서 ‘검은 돌’은 시대의 기호에서 벗어나 있다. 이것은 중동 체류 중 가장 비현실적인 대상이다. 그것은 세속적 가치에서 탈각한 주술적인 대상이자 어떤 믿음의 사물로 작동하기 때문이다. 아마도 중동이라는 초현실적인 장소에서 발견된 사물이기에 더 큰 의미가 부여되었을 수도 있다. 검은 돌은 중동이 실존하는 장소라는 사실을 알려주는 유일한 물질이자 기호이며, 역설적으로 비물질적인 의미를 내재한 대상이 된다. 그것은 식별되지 않는 상징이 된다. 실제로 인류의 신비는 이처럼 보잘것없는 돌멩이에서 비롯된 셈이니 말이다. 따라서 검은 돌과 다리미는 그것의 원형인 돌, 철, 흙과 같이 원소적인 것으로 환원된다. 김리윤의 시는 아크릴 거울 위에 뒤집혀 적혀있는데, 이는 아랍어의 방향성을 감각하기 위한 것으로 추상성이 배가된다. 여기에 무용가 김석중이 비계 사이를 느리게 수직과 수평을 교차하여 나아가는 모습은 신체의 움직임을 통해 노동과 생존이 무엇인지를 질문하게 만든다. «검은 돌과 다리미»는 아버지를 화자로 한 기억, 물질 그리고 비물질을 교차시켜 중동을 상상하게 하는 통로를 열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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