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of page

비결정적 세계에서 감각—하기:

주체가 사라진 중심 이후의 자리

글. 이상미 (독립 큐레이터)

1.

인류가 지구에서 완전히 사라진 이후의 세계를 상상해 본다. 그 세계는 여전히 작동하지만, 더 이상 인간 중심으로 기능했던 이성과 인지, 감각을 축으로 구성된 총체가 아니다. 인지적 구심점이 해체된 이후의 세계는 복수의 존재들이 얽힌 복합적인 장(field)으로 변모한다. 이 장에서는 물질과 비물질, 의미와 무의미, 인지 가능성과 불가능성이 서로 교차하며 감각은 고정된 범주가 아닌 유동하는 상태로 존재한다. 이웅철 개인전 《비-세계》는 이와 같이 인간이 소멸한 지구 환경의 전환과 위상 변화를 전제로 한다. 작가는 이 전시를 통해 인류세(Anthropocene) 이후의 예측 불가능한 미래를 상상하며 인간중심주의(Anthropocentrism)적 사고에서 벗어나려는 태도를 드러낸다. 불확정적이고 비선형적인 사건으로 감각의 주체(인간)가 사라진 세계에 기념비처럼 남겨진 인류 문명의 잔해와 인간 외의 존재들은 분명 기존과는 다른 생태 환경에서 그 쓰임을 달리하며 미지의 영역에 자리할 것이다 이처럼 포스트아포칼립스(post-apocalypse)적 상상을 시각적으로 구현하는 이번 전시는 환경파괴와 기후 위기, 인간 외 존재의 도구화, 관계의 단절과 윤리적 편협성이 초래한 지속 불가능한 우리의 미래를 환기시킨다. 동시에, 예측할 수 없는 미래와 접촉할 수 있는 틈(interstice)을 만들어 유토피아적 가능성을 상상하도록 이끈다. 또한 전시 공간은 감각의 조건이 낯설게 재배열되는 일시적 실험 장소로 기능하며,[1] 익숙한 질서가 해체된 자리는 미지의 가능성을 탐색할 수 있는 잠재적 공간으로 전환되어 관람자와 틈을 매개한다.

 

 

2.

이번 전시에서 작가는 조각, 설치, 세라믹, 영상, 사운드 등의 다채로운 매체를 다루며 물질과 비물질을 아우르는 복합적 서사를 엮어낸다. 각 작품은 독립적인 개별성을 지니면서 하나의 제언으로 수렴되고, 저마다 다른 형식으로 그가 던지는 질문을 구체적으로 펼쳐 보인다. 인류세 이후, 마치 지구 어딘가에 남겨진 고대 구조물처럼 보이는 작품 〈타워(Tower)〉(2025)는 콘스탄틴 브랑쿠시(Constantin Brancusi)의 대표작 〈무한주(Endless Column)〉(1937–38)의 조형 언어를 참조하면서도 그것을 해체하는 방식으로 변형했다. 이 세계에서 인간이 창작한 조각작품은 의미와 기능이 소실된 채 형태와 덩어리만 남고 본질은 전이되어 미지의 존재들을 위한 구조물이 된다. 작가는 이렇게 남겨진 사물들이 다른 개체들의 서식지이자 놀이 공간으로 전환될 수 있다고 상상한다.[2] 인간 문명의 부산물처럼 잔존하는 예술 작품은 더 이상 기념비적 기호가 아닌 생태적 오브제로 작동하며, 목적과 기능의 상실을 통해 새로운 상호작용의 가능성을 제시한다.

한편, 〈리플레이(Replay)〉(2025)와 〈좌표들(Coordinates)〉(2025)은 인류가 존재했음을 증명하려는 일종의 증언이자 기록의 의미를 갖는다. 〈리플레이〉는 이웅철과 사운드 아티스트 서혜민이 협업해 LP로 제작한 사운드 작품이다. 이웅철이 채집한 바닷속 소리와 일상의 기계음을 토대로 서혜민이 사운드 디자인과 편집을 더해 사운드스케이프(soundscape)로 완성했다. 총 20분 길이로 구성된 이 작품은 바닷속 산호와 돌고래 소리, 기계음, 전자음, LP 특유의 노이즈 등이 뒤섞여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음악적 구조를 해체한다. 이러한 해체는 예측할 수 없는 음향의 질서를 만들고, 낯설고 불안정한 소리가 미지의 존재들에게 어떠한 방식으로 수용될 수 있을지 질문한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좌표들>은 인류세 이후 등장할 고등한 존재들에게 인간의 존재를 시각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제작되었다. 인간의 얼굴을 3D로 스캔해 생성한 좌표를 납작한 점토판에 새긴 뒤 다양한 형태로 변형한 이 세라믹 작품은 가마에서 고온의 소성 과정을 거쳐 완성된다. 약 1,000℃ 이상의 온도에서도 쉽게 소멸되지 않는 특성을 지닌[3] 이 작품은 척박한 환경에서도 존재의 흔적을 영속적으로 보존할 수 있는 가능성을 함의한다. 디지털 데이터로 변환된 얼굴이 다시 물질로 회귀하는 과정은 기술과 원시성의 만남을 상징하며, 미래의 고고학적 발견물로서 우리 시대의 단서가 된다. 그러나, 이는 동시에 인간이 스스로를 증명하고자 하는 욕망의 잔해이자, 온전히 해석되지 못할 불완전한 증거이기도 하다. 인간이 부재한 시공에 남겨진 기록은 단일한 의미를 갖지 않고 다양한 방식으로 오독되거나 재구성될 수 있다. 결국, 데이터로 변환된 우리의 얼굴은 더 이상 주체의 표상이 아닌 식별 불가능한 존재의 증거로 전환되어 인식 바깥에 남겨진 것들, 그리고 그것을 감지할 수 없는 한계와 결함을 드러낸다.

또 다른 작품 〈테라노바(Terra Nova)〉(2025)는 인공적으로 구축된 생태학적 관계망을 통해 (인간) 생존의 지속 가능성을 탐색한다. 직사각형 구조물 내부에 옥수수나무를 심고 그 성장 과정을 관찰하도록 설계된 이 작업은 인위적으로 조성된 공간을 하나의 압축된 생태계로 제시한다. 사면을 거울로 감싼 구조는 공간과 식물이 무한히 확장하고 증식하는 듯한 감각을 불러일으키며, 물리적 한계를 시각적으로 해체함으로써 과거·현재·미래가 중첩하는 시공간적 특이성을 현현한다. 동시에 이 작품과 연결선상에서 제작된 영상 작업은 옥수수가 심어진 자연, 생태적 이미지가 AI 기술과 결합되어 자연과 인공의 간극을 드러낸다. 이러한 작품의 이중 구성은 인간의 개입과 자연의 자율성이 교차하는 지점을 가시화하며, 인류 문명의 종언 이후에도 새로운 환경에서 삶을 지속할 수 있는 생태적 조건과 복수의 존재들 간의 관계 재편 가능성을 은유한다.

 

 

3.

이웅철 개인전 《비-세계》는 ‘부재하는 감각 주체’라는 조건 아래 형성된다. 이는 인류의 소멸을 선언하기보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방식으로 이어질 세계의 가능성을 질문하는 방식으로 전개된다. 인간이 부재하는 세계를 상상함으로써 우리는 비로소 인간의 취약성을 직시하게 되고, 그 취약성에서 발현된 창조적 잠재력은 새로운 태동의 가능성을 열어 보인다. 각자의 방식으로 발화하는 작품들은 중심에서 벗어난 구조 위에서 새로운 가능과 확장을 예비한다. 또한 예측 불가능한 질서, 인식되지 않는 잔여, 정의되지 않는 접촉들이 만들어 내는 생경한 미래를 모의한다. 기존의 중심을 해체하는 것은 파괴가 아닌 스스로를 재편할 수 있는 가능성의 통로를 여는 일이다. 관람자는 이러한 무형의 통로를 통과하며 세계가 가진 낯선 지속성을 마주하고 비결정적 미래를 감각하는 능동적 주체가 된다. 사라짐은 끝이 아니라 전환의 조건이 되고, 잔해는 무용한 것이 아니라 새로운 질서를 생성할 수 있는 매개체가 된다. 이와 같이 이번 전시는 다층의 맥락과 해석이 공존하는 열린 구조를 지닌다. 정해진 결론으로 수렴하기보다 불확실한 상태를 유지하며 각기 다른 의미가 교차하고 충돌할 수 있는 새로운 자리를 만든다. 의미를 단일하게 고정하지 않고, 아직 언어로 도달하지 못한 차원을 열어두며, 변화와 재구성을 포용한다. 이는 작가가 상상하는 비-세계에 접속하는 하나의 방식이며, 감각과 인식이 재배열되어 낯선 형식이 새롭게 출현하는 순간을 위한 예행이다.

 

 

글. 이상미 (독립 큐레이터)

 

 

 

 

 

[1] 마르크 오제, 『비장소』, 이윤영 옮김, 문학동네, 2017, 이웅철 작가는 전시명 《비-세계》를 오제가 해석하는 현대 사회의 익명적, 임시적 공간을 비장소로 정의하는 것에서 착안했다. 포스트아포칼립스를 상상하며 인식과 감각이 재배열되는 일시적 실험의 장소로서 전시 공간을 비장소/비세계로 활용한다.

[2] 이웅철 작업 노트(2024) 참조

[3] 이웅철 작업 노트(2024) 참조

 © 2024 Woongcheol Lee All Rights Reserved

  • Grey Instagram Icon
  • Grey Vimeo Icon
bottom of p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