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명주
“포스트 아포칼립스 서사를 어떻게 진부하지 않게 만들 것인가.”
이는 오늘날 전시 기획자와 예술가에게 던져진 가장 도전적인 질문 중 하나일 것이다. 더 이상 우리는 “인간은 어떤 위기에도 끝내 살아남는다”는 낡은 희망 서사에 위안을 얻지 못한다. 동시에 현 문명을 근본에서 해체하려는 포스트휴머니즘 담론이나 반휴머니즘적 급진성에도 깊은 피로를 느끼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이웅철의 이번 전시는 포스트 아포칼립스를 주된 주제로 하지만, 인류의 생존 서사의 재현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그의 작업이 그 반대항으로서 반휴머니즘적 비관주의나 포스트휴머니즘 담론에 서 있다고 단언할 수도 없다.
그의 전시는 오히려 ‘사라짐의 미학’에 가깝다. 이를 가장 근접하게 설명할 수 있는 틀은 일본 미학의 와비사비(侘寂, わび・さび), 곧 불완전성과 덧없음에서 비롯되는 아름다움이다. 그러나 중요한 차이가 있다. 와비사비가 덧없음의 찰나에 깃든 미를 강조한다면, 이웅철의 작품은 프랑스 정치철학자 알뛰세의 저서 제목처럼 “미래는 오래 지속된다”는 전제를 품고 있다. 관객은 이 덧없음을 순간적으로가 아니라 ‘미래적으로’ 추체험하게 되는 것이다. 결국 그의 전시는 현재를 넘어선 시간 속에서 ‘미래의 와비사비’를 감각하게 한다는 점에서 독창적이다.
가장 인상 깊은 작품 중 하나인 〈타워〉는 제의적(祭儀的) 아우라를 지니며, 하늘과 땅을 잇는 듯한 상징성을 드러낸다. 그 형태는 특정 개인이나 집단, 혹은 일시적 시대를 넘어서, 인류라는 종이 장구한 시간을 가로질러온 여정과 정념, 분투, 성찰을 환기한다. 작품의 재질이 노끈이라는 점 역시 계승과 연속성의 상징성을 덧입힌다. 결과적으로 이는 영국 스톤헨지의 선사적 유적이나 스탠리 큐브릭의 영화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에 등장하는 모노리스와 겹쳐지며, 정체 불명의 영겁적 시간성을 환기한다. 그러나 결정적인 차이는, 이웅철의 〈타워〉는 영속을 지향하는 이들 유적들과 달리 식물성 재료로 만들어져 필연적으로 빠른 소멸을 운명처럼 안고 있다는 점이다.
풍화와 부식 속에 점차 남루해져 가는 〈타워〉를 상상하는 것은, 결국 세상의 그 어떤 것도, 심지어 “인간적인 아름다움의 정수이자 총화”라 할 만한 것조차 반드시 후세에 전해질 수 없으며, 어쩌면 그럴 필요조차 없다는 불편하면서도 형용하기 어려운 미감을 불러일으킨다.
〈좌표들〉 역시 주목할 만하다. 이 작품은 인류세(Anthropocene) 이후 등장할 미지의 고등 존재에게 인간의 존재를 시각적으로 전달하려는 시도로, 인간의 얼굴을 3D 스캔하여 좌표로 변환한 뒤 점토판에 새긴 세라믹 조각이다. 고온의 가마 소성과정을 거쳐 섭씨 1,000도 이상의 열에도 견딜 수 있는 이 물성은, 인간이 흙에서 태어나 디지털 데이터로 변환된 뒤 다시 불 속을 거쳐 흙으로 회귀하는 순환적 상상력을 담아낸다. 그러나 그 질료는 충격에는 유리처럼 취약하여, 깨지기 쉬운 청자의 운명을 닮아 있다. 이는 인간의 계승 욕구가 결국 얼마나 소박하고 부질없는지 역설적으로 드러내며, 비(非)인간들이 마주할 인간적 흔적의 무의미성을 상기시킨다.
이웅철의 작품들은 장구한 시간 속에서 인류가 축적한 노력들조차 짧은 시간에 무너져 사라질 운명임을, 깊은 비감미(悲感美)로 보여준다. 그러나 이 비감미는 단순한 비관으로 귀결되지 않는다. 그것은 인류라는 종 전체와 맞닿은 일종의 숭고미로, 본래의 용도상 예술이 아니었던 사물들을 수비니어(souvenir)화하여 미래를 향해 던지고, 그 흔적을 풍화 속에서 예술적으로 관조하려는 인간적 ‘분투’를 담아낸다.
포스트 아포칼립스 시대, 곧 인간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시간 속에서, 아름다움을 추구했던 모든 인간적 시도는 과연 무의미한가, 아니면 여전히 유의미한가.
어쩌면 이 물음 자체가 끝내 유효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우리의 종적 운명을 안타까워해야 할 가장 큰 이유는, 바로 그 소멸의 문턱에서도 아름다움을 예술로 감각하려는 인간의 몸부림 속에 있기 때문이다.